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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서 흘러내린 피로 모기를 불러모아!

희랑대는 그 암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희랑조사가 머물던 곳이다.
희랑조사(889~956)는 통일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해인사의 고승이다. 화엄학(華嚴學)의 대가였던 스님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해인사를 중창하기도 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조사도(祖師圖·1892년 제작)'를 보면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 이정 스님과 함께 그려질 만큼 희랑조사는 불법을
크게 일으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자연이 이루어낸 기묘한 지형과 빼어난 경치로 일찍부터 금강산 보덕굴에
비유되곤 했던 희랑대는 희랑조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스님이 희랑대에 머물던 무렵 가야산 해인사에는 모기가 많기로 유명했다.
수도를 하는 스님들이 모기 때문에 정진을 못하자, 희랑조사는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해인사의 모든 모기들은 희랑대로 모여들었고, 다른 스님들은 편안히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늘의 신장(神將)을 부를 정도로 희랑조사는 법력이 높았다는 얘기도 있다. 후삼국 시대의 전란을 딛고 화엄종을 중흥시킨 희랑조사의 업적을 두고, 스님과 교분을 나눈 고운 최치원은 여섯 수의 시에서 스님을 문수보살에 비유하고 있다.

희랑대 뒤 큰 바위 곁에는 희랑조사가 심었다는 노송 한 그루가 있었으나 10여 년 전 말라 죽었다. 희랑대 뒤 삼성전(三聖殿)에 모신 독성(獨聖) 나반존자(那畔尊者)는 그 영험이 불가사의해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나반존자는 말법시대에 나타나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며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다. 1940년 희랑대를 중창할 무렵 본래 계획은 암반 위에 2칸 6평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목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두 칸은 너무 적으니 3칸으로 지어달라고 해 3칸으로 지었다는 것. 꿈에 나타난 노인이 바로 독성 나반존자라는 얘기다.

원만무애의 깨달음을 담은 희랑조사상!

해인사 들머리에 있는 성보박물관. 이 곳에 가면 다양한 불교 유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대장경 인경 체험도 가능하다. 박물관 1층에 마련된 전시실을 찾으면 나무로 만든 희랑조사상을 만날 수 있다. 1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조각상은 희랑 스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초상조각으로 초상기법이나 불상양식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유물이다.

희랑대에 얽힌 전설처럼 조사상을 보면 특이하게도 가슴 한가운데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다. 제자들의 수행을 위해 가슴에 구멍을 뚫어 피를 흘려 모기를 불러모았다는 희랑조사의 전설을 조각상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희랑조사가 직접 조각상을 만들면서 자신이 전생에 흉혈국(胸穴國) 사람임을 표시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다는 전설도 있다. 흉혈국 사람들은 가슴에 있는 구멍을 통해 불법의 기운을 내쏘았다는 것이다.

희랑조사상을 보면 살아 있는 스님을 뵙는 듯 생생하다. 형형하면서도 온화한 눈빛, 광대뼈 튀어나온 볼, 오뚝한 코, 부드럽게 다문 입, 서로 포개진 앙상한 손 등 마음씨 넉넉한 노승의 풍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 철썩 같은 수도와 내공으로 다져진 의연함과 단호함도 느낄 수 있다. "차 한잔 들고 가지(喫茶去)."하며 길손을 맞을 것 같은 모습이다. 해인사의 이름이 유래된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온갖 번뇌가 끊어진 고요한 상태)'의 경지를 조각상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은은한 기품이 감도는 희랑조사상은 전통 조각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보물 999호로 지정돼 있다. 팔만대장경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해인사에서 가장 아끼는 조각 유산이다. 사람 앉은 키 높이인 82.7cm의 이 조사상은 나무로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초상조각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도 매우 크다. 나무 표면에 올이 고운 삼베를 붙이고 다시 그 위에 두껍게 채색을 했다. 비현실적으로도 느껴지는 불상 조각과 달리 인간미 넘치는 현실적 용모와 몸체를 그대로 살린 사실주의적 인물상이어서 더욱 정감이 간다.

세상이 어지러웠던 후삼국 시대와 고려 초기를 살았던 희랑조사. 앙상한 몸매와 세모진 턱, 눈꼬리와 이마의 주름 등에서 희랑조사가 겪었던 격동의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스님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산전수전 세파를 겪으며 지혜가 첩첩이 쌓인 때문인가. 스님의 입가엔 엷은 미소만 맴돌고 있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수행승의 은인자중하고 사려깊은 면모가 절로 느껴진다. 원만무애(圓滿無碍)의 깨달음을 희랑조사상은 박물관을 찾은 이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