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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랑대(希朗臺)와 희랑조사(希朗祖師)

해인사 희랑대는 해인사 중창주(重創主)이신 희랑조사께서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을 수행하시던 장소로, 수행하는 가운데에 주변의 지형(地形)과
산세(山勢)가 나반존자(那畔尊者)의 도량(道場)과 흡사하다는 것을
살피시고, 평소 좌선(坐禪)에 드시던 바위 옆에 소나무를 심고서 도량을
창건(創建)하게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희랑대는 지대(地帶)로 보아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기묘(奇妙)한
지형과 수승(殊勝)한 풍치(風致)가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다. 이곳이 금강산
(金剛山) 보덕굴(普德窟)에 비유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희랑대 독성전(獨聖殿)에 모셔진 독성(獨聖) 나반존자는 그 가피(加被)와
영험(靈驗)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오랜 세월동안 숭앙(崇仰)을 받아 왔으며,
기도의 성취(成就)와 감응(感應)은 물론 독성의 현신(現身) 등의 영험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 후 보광성주화상(普光性株和尙)께서 퇴락한 독성전을 중창하였으며, 지장전과 설법전과 요사채 등 도량의 규모를 일신하여 갖추었다.

희랑스님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복전(福田)이자 존사(尊師)로서 고려의 건국(建國)을 돕고, 왕실과 국가의 신임과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중창한 대공덕주(功德主)로서 나반존자를 본사(本師)로 모시고 수행하셨다. 희랑스님은 평소 희랑대 독성전 옆의 안장바위(엉덩이바위)에서 좌선삼매(坐禪三昧)에 들어가 참선 수행하시면서 희랑대 주변의 산세와 정면으로 보이는 노적봉과 백년암 방향의 동쪽 바위 등의 지형을 관망하시고, 본사로 모시는 나반존자께서 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자취를 숨긴 도량(송암은적 松巖隱跡)과 흡사하다고 느끼시고서 이를 계기로 참선하시던 바위 옆에 독성각을 짓고 나반존자를 봉안하여 희랑대를 창건하셨다.

그러므로 희랑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山勢)와 지형이 희랑대에 나반존자를 모시게 된 결정적인 요건이며, 희랑대 자체가 나반존자가 자신의 자취를 숨긴 도량과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희랑대를 창건하신 희랑조사는 나반존자를 본사로 모시고서 나반존자의 수행을 흠모하며 수순(隨順)하셨는데, 입적(入寂)하신 후에도 나반존자의 선례(先例)를 따라 자취를 스스로 숨기고자 비문(碑文)이나 영정(影幀) 등을 남기거나 허락하지 않으신 것에서 희랑스님의 뜻과 의지를 미루어 짐작하고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애끓는 추모의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후학들은 희랑스님이 남기신 유지(遺志)를 어기지 않으면서 스님을 향한 그리움을 담아내고자 하는 일념(一念)으로 희랑조사상(希朗祖師像)을 조성(造成)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역사적으로 희랑스님만이 유일하게 목조조상(木造彫像)의 진영(眞影)을 남기게 된 것이다. 유추하건데 희랑스님께서는 말세(末世)의 중생들을 위해서 스스로 나반존자로 환생(還生)하여 중생들의 기도와 소원과 정성에 감응(感應)하시고자 하는 교화(敎化)와 원력(願力)의 의지로 희랑대를 창건하고 희랑대에 주석(駐錫)하였던 것이다.